용인 이씨는 휘 길권을 시조로 그 후손들이 고려 및 이씨 왕조를 거쳐 오늘에 이르는동안 한반도에 널리 퍼져 면면히 세대를 계승하면서 기여하여 왔음은 실로 자랑스러운 일이다.
시조께서는 신라 헌강왕 6년(서기 880년) 이곳 용인에서 탄생하셨다.
본래 천성이 강직하시고 도량이 활달하시며 학문을 즐겨 천문지리에 능통하시었다.
공께서는 고려건국에 공훈이 크셨으므로 고려 태조가 즉위한 후 그 공로로 오백호와 산성군을 봉하였으나 공께서는 자신의 영달을 위한 벼슬을 생각하시지 않고
오직 겸양의 마음으로 하사한 녹을 사양하시었다.
그 후 태조는 더욱 공의 덕을 승모하여 다시 구성백 삼한벽상공신 삼중대광승록대부 태사를 제수하고 능선각28숙을 제하여 공신으로서 제2위로 정하고 또한 부마를 삼았다.
그 후 공께서는 벼슬을 뜬구름과 같이 생각하시고 고향인 용인에 돌오시어 청빈하게 사시다가 서기 984년 갑신에 하세하셨으니 천수가 105세이시며
나라에서는 안의의 익호를 내렸다. 묘는 이곳 자은교촌이라 하나 실전되었다.
국가에 유공한 후손중에는 14세손 휘 중인이 고려말의 문하우시중 구성부원군으로 고려가 망한후 조선태조가 구성백을 봉하였으나
받지 않으시고 두문동에 입산하시어 고려에 대한 일편단심의 충절을 지키셨다.
그 후 의정부 송산사에 조송산 원양촌 김농암 김일노정 유송은 등과 함께 공을 봉안하여 유림에서 제향을 받들고 있다.
16세손 휘 백지는 강원, 전라 감사를 역임한 바 청렴결백하여 태종때에 청백리의 칭호를 받았으며 27세손 휘 세백이 숙종때에 좌의정을 28세손 휘 의현이
영조때에 영의정을 31세손 휘 재협이 정조때에 영의정을 각각 지냈으며 32세손 휘 삼현이 예조판서로 문명을 날렸다.
장군으로는 선조 임진난때에 25세손 휘 유일과 23세손 휘 일이 대공을 세워 무명을 날렸으며 이 외에도 수많은 보국안민의 사표가 되어 용인이씨의 혁혁한 전통을
빛냈으며 현재에도 각계 각분야에서 제제한 인사들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음은 바로 우리 용인이씨로 하여금 탁월한 긍지를 갖게하는 바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