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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자는 저의 내자입니다
용인이씨와 신사임당
이상안
자라면서 나는 가문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지천명(知天命)을 넘긴 우리의 세대가 자라난 당시의 사회 분위기가 그랬는지 아니면 유독 내가 자란 시골의 작은 마을, 그도 아니면 우리 집만 그랬는지는 잘 알지 못한다.
아버지께서는 저녁상을 물리신 후면 우리 4남매를 앞에 앉혀 놓고 우리 가문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시곤 했다. 16대조, 17대조로 이어지는 긴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는 온몸이 뒤틀려 빨리 말씀을 끝내고 사랑방으로 건너가시기를 간절히 바랐다. 말씀을 끝내신 아버지가 사랑방으로 건너가신 후에라야 비로소 다리를 뻗고 편하게 행동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특히 딸들을 대하실 때면 모든 말씀 앞에다 반드시 여자라는 말을 덧붙여 여자임을 강조하셨기에 나는 언제나 아버지 앞에만 서면 주눅이 들곤 했다. 넘어지거나 실수로 물이라도 엎지르면 ‘여자가 정(靜)찮다.’ 며 주의를 주시곤 했기에 몇 십년이 지난 요즈음도 내가 친정에 가서 조그마한 실수라도 하면 남동생이 이 말로 가족들을 웃긴다. 그래서 어릴 때 내가 무언가 잘못하면 나 자신보다도 가문에 누를 끼칠 수 있다는 생각으로 기를 못 펴고 살았다.
당시까지도 우리 마을에는 조선시대 반상(班常)의 신분 차이 같은 것이 잔재하고 있었다. 정자지기나, 숲지기, 산지기 분들은 노인이면서도 알려진 집안의 아이들에게 존대말을 썼고 아이들은 반대로 반말을 했다. 사춘기를 겪으면서 나는 이런 인간 차별이 존재하는 사회가 싫었다. 양반이니 가문이니 하는 것을 화제로 올리는 아버지가 참으로 못 마땅했다. 아버지의 생각은 너무나 고루하여 나의 생각과 엄청난 세대차가 존재한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깊은 뜻을 이해조차 하려 하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비교적 늦은 결혼을 했다. 결혼 전 남편에게 본관을 물어보니 용인이라 했다. 용인이씨는 내가 처음 들어보는 성씨인지라 생존해 계신다면 뭐라 하실지 아버지 생각을 잠시 했던 기억이 난다. 그 후 봉제사하는 맏집의 종부로 두 아이의 어머니로 바쁘게 살았다. 아이들이 둘 다 대학에 들어간 금년에야 겨우 여유가 생겼다.
강남문화원에서 주관하는 역사아카데미에 참석하여 유명 학자들의 강의도 듣고 문화유적 답사에도 동참했다. 교과서에서만 보던 역사 그것도 그 동안 거의 다 잊고 있던 역사의 현장에서 많은 감명과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나의 삶과 존재와 뿌리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지난 12월 16일에는 율곡 이이의 자운서원을 중심으로 경기 북부지역의 문화유적 답사를 했다. 유유히 흐르는 임진강을 바라보니 새삼 분단된 조국의 현실이 떠올라, 무리지어 남북을 자유로이 오가는 기러기떼가 부러웠다.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산 5-1번지의 자운서원은 율곡 이이선생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자운서원 경내에는 어머니 사임당신씨와 율곡의 묘소도 있다. 1972년에 들어선 기념관에는 신사임당과 율곡의 영정, 이들 가족들의 서화작품과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이것들은 모두가 복제품들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풀벌레, 나비, 꽃, 오이 등을 그린 초충도 평풍의 그림들은 기운이 산뜻하여 꼭 살아 있는 것 같았다.
나는 한쪽 벽면에 붙어 있는 율곡의 가계도에서 용인이씨라는 네 글자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그것도 두 곳에서다. 언젠가 시댁 어른으로부터 신사임당의 어머니가 용인이씨라는 말씀을 들은 기억이 있었는데 오늘 직접 내 눈으로 확인을 한 셈이다. 기뻤다. 그리고 반가웠다. 신사임당이 누구며 율곡 이이는 또 누구인가. 잘난 것 없어도 남자는 우대받고, 아무리 재주가 빼어나도 여자는 삼종지도니, 칠거지악이니 하는 멍에와 굴레 속에서 천시 받던 조선 왕조시대에 태어났으면서도 어버이에게는 효녀, 지아비에게는 정숙한 아내, 자식들에게는 현모의 위치를 슬기롭게 지키며 끊임없는 자기계발을 통해 학문과 예술에서도 탁월한 경지를 이룩함으로써 우리나라 여성사에서 가장 훌륭한 인물로 존경과 칭송을 한 몸에 받고 있는 분이다. 또 당대의 천재요, 대학자요, 정치가일 뿐만 아니라 성품조차도 어질고 인자하여 모든 사람들의 존경을 받음으로써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오천원권 지폐의 모델로도 추앙 받는 율곡을 아들로 두셨다. 자기 성취와 자식들의 출세에 인생을 거는 오늘날 여성의 시각으로 바라보아도 성공적인 삶을 사신 분이다. 이런 분을 따님으로 두신 어머니, 그 어머니가 바로 우리 용인이씨다. 다시 말해 사임당 신씨의 친정어머니시며 율곡 이이의 외조모님이시다. 그리고 율곡의 장남을 낳은 둘째부인도 용인이씨라 한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언제나 안방 책꽂이 상석을 차지하고 있는 용인이씨 대동보를 꺼내 먼지를 털고 서문부터 읽어 내려갔다. 비로소 내가 비교적 좋은 가문으로 시집을 왔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버지가 살아 계셨더라도 결혼에 찬성을 하셨을 것 같았다. 오늘에 와서 어찌 가문의 우열을 높은 관직에 오른 선조들의 수로 가릴까마는 이에 못지않게 선조들이 살다 가신 삶의 모습과 인류문화에 공헌한 우리 씨족의 역사 앞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우리 가문의 처음 족보인 임자구보(壬子舊譜)의 서문을 본다.
“효우(孝友)로써 가문의 본을 삼고, 충후(忠厚)로써 가문의 덕을 높이고 염정(廉正)으로 가문의 조를 단장하니, 효우와 우애를 내세우는 곳에 화목과 긍휼의 전통이 서고, 두터운 신의를 쌓아 올리는 가운데 남들에게 어진 은덕과 혜택을 널리 끼치게 되고, 청렴하고 정직한 마음씨가 나타나는 곳에 근검절약하는 기풍이 서게 되는바 이런 것이 태사공(太師公)이래 세세에 전승하여 내려온 가풍이 되었느니라!”
가문의 자랑을 할만도 한데 겸손하신 어른들의 깊은 뜻을 알 것도 같았다.
비록 외손이기는 하나 겨레의 어머니요 스승이라 불리는 두 모자분이 우리집 종보에는 어떤 식으로 표기되어 있는지를 확인해 보고 싶었다. 딸들을 종중원으로 인정해달라며 법정 투쟁중인 용인이씨 따님들의 일도 머리 속에 머물고 있기 때문일까. 막상 8권이나 되는 종보에서 태어난 연대만 가지고 사임당의 외조부이신 생원 이사온이라는 함자를 찾기란 그리쉽지가 않았다. 나는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누대의 조상님들 속에 파묻혀 일주일이 넘는 시간을 보냈다. 중시조가 어느 분이며 무슨 파인가만 알아도 이렇게 어렵지는 않을텐데, 포기하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러다 나는 오늘 마침내 용인이씨대동보 4권 404면에서 (子)사온 (女)이씨 아래로 (女) 신사임당 아래로 (子) 이이에 이르는 기록을 발견했다.
나는 지금 종보의 이 페이지를 펼쳐두고 아이들의 귀가를 기다리고 있다. 아이들이 오면 이런 위대한 인물이 우리집 족보에 이렇게 올라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려는 것이다.
지난날 친정아버지가 선조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셨던 것처럼 율곡이나 신사임당이라면 아이들도 잘 아는 훌륭한 분들이니까, 생소한 다른 조상님들 이야기보다는 실감이 날 것같다. 반응이 시큰둥하더라도 실망하지는 않으려 한다. 저희들도 언젠가는 이 엄마의 행동을 이해 할 수 있는 날이 올 것을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대로 잘 접어 두었다가 며칠 남지 않는 설날 차례상을 물린 뒤 올망졸망 아직은 초등학생들인 열명도 넘는 종질들에게도 열어 보이며 내가 자운서원에서 받은 인상을 설명해 주려 한다. 그들이 앞으로 율곡과 신사임당을 학교에서 배울 때 이 장면을 떠올리며 가문에 대한 자긍심을 갖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세상이 너무나 빨리 변하고 호주제마저 없앤다고 하지만 효도와 우애와 신의를 중시하는 가문의 전통만은 후손들이 잘 이어가 주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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