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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양공(이일장군)정토시전부호도

작성자
이완영
작성일
2011.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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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수
1
조회수
2547
내용

 

 

大將 嘉善大夫 咸鏡北道兵馬節度使 李公 諱鎰, 字重卿, 龍仁人

 助戰將 折衝將軍 咸鏡北道兵馬虞侯 徐得運, 字德久, 利川人
 從事官 彰信校尉 咸鏡北道兵馬評事 李用淳, 字士和, 全州人
 從事官 承議郞 兼輸城道察訪 沈克明, 字伯晦, 靑松人
 審藥 宣敎郞 李蕙汀, 字芳叔, 全州人
 助戰將 及第 曺大坤
 助戰將 及第 申恪, 字敬仲, 平山人
 助戰將 及第 李瑛, 字公獻, 咸平人
 助戰將 及第 元豪, 字仲英, 原州人
 助戰將 前判官 韓仁濟, 字濟仲, 淸州人
 助戰將 彰信校尉 撫夷堡兵馬萬戶 金億秋, 字邦老, 淸州人
 助戰將 秉節校尉 訓鍊院參軍 朴弘長, 字士任, 務安人

左衛

先鋒將 折衝將軍 高嶺鎭兵馬僉節制使 劉克良, 字景善, 白川人
 龍驤都將 及第 李[王+發], 字汝獻, 咸平人
 虎賁都將 前縣監 李宗仁, 字伯春, 全州人
 獅吼都將 及第 禹應台, 字三彦, 丹陽人
 熊搏都將 權知訓鍊院奉事 黃大鵬, 字冲雲
 豹攫都將 通德郞 通禮院引儀 金慶福, 字伯綏
 左鶻擊將 及第 徐禮元, 字肅大
 右鶻擊將 禦侮將軍 都摠府經歷 宋弘得, 字伯實
 左火烈將 及第 李沃, 字子潤
 右火烈將 及第 邊良俊, 字國萃

 左部將 及第 姜仲龍, 字時用
 前部將 及第 朴知進, 字退而
衛將 嘉善大夫 行會寧都護府使 邊彦琇, 字君獻
 從事官 前判官 趙儆, 字士惕
 中部將 彰信校尉 訓鍊院主簿 魯興文, 字斐然, 咸平人
 遊軍將 彰信校尉 龍驤衛後部將 李琰, 字精叔, 全州人
 右部將 及第 權洪, 字寬仲, 安東人
 後部將 秉節校尉 副司果 宋悌, 字友叔, 南陽人
 斬退將 及第 朴仁鳳, 字而瑞, 務安人
 捍後將 顯信校尉 永建堡兵馬萬戶 朴潤, 字德用, 靈巖人

一繼援將 中直大夫 富寧都護府使 李時請, 字詠而, 丹山人 → 李之詩의 誤記.
二繼援將 朝散大夫 慶興都護府使 鄭見龍, 字雲卿, 東萊人

右衛

先鋒將 折衝將軍 咸鏡北道 助防將 李薦
  領將 權知訓鍊院奉事 姜萬男
 龍驤都將 折衝將軍 行副護軍 宣居怡
  領將 保人 李用濟
 虎賁都將 折衝將軍 前虞侯 金遇秋
 獅吼都將 及第 吳彦良
 熊搏都將 及第 李忠獻
 豹攫都將 前察訪 黃進
 左鶻擊將 宣略將軍 訓鍊院僉正 元熹
 右鶻擊將 及第 李慶祿
 左火烈將 及第 成天祉
 右火烈將 及第 李舜臣

 左部將 顯信校尉 守門將 洪祐
 前部將 權知訓鍊院奉事 辛礎
衛將 通政大夫 穩城都護府使 楊大樹
 從事官 及第 金聲○
 中部將 權知訓鍊院奉事 金夢虎
 遊軍將 前判官 田鳳
 右部將 訓鍊院習讀 元裕男
 後部將 權知訓鍊院奉事
 斬退將 前萬戶 金光睟, 字子潤, 義城人
 捍後將 承義副尉 西水羅堡權官 林秀, 字芳仲, 寶城人

一繼援將 通政大夫 鍾城都護府使 元均, 字平仲, 原州人
二繼援將 奉訓郞 明川縣監

宣廟丙戌, 公陞移本道兵使, 仁威廣覃, 邊圍寧謐, 仍條陳軍務二十九事, 禁令二十七條, 竝錄制勝方略一件, 奏請取講諸將, 以行殿最, 上特令施之, 方略之詳備頒行, 自公始焉, 先是, 北邊野人, 款塞內附, 給其衣廩, 留居六鎭城底矣, 尼湯介潛誘越邊野人, 攻陷慶源, 搶奪高嶺, 公時莅慶源會寧, 皆建斬獲之功, 丁險, 公自本營巡到慶興, 密捕何吾郞等, 誅之, 令虞侯金遇秋, 襲破楸島部落, 蕩其巢穴, 是時, 慶興撫夷時錢等部强盛, 而夫汝只部落最强難制, 公遂將邊事馳啓, 上回諭因許討之, 公以戊子正月, 簽發本道兵, 副以赴戍兵, 使會寧府使邊彦琇, 穩城府使楊大樹爲左右衛將, 高嶺僉使劉克良, 助防將李薦爲左右衛先鋒, 習陣于行營, 蓐食于德明驛, 左軍, 由阿吾郞地白顔烟臺, 循山而北, 右軍, 自撫夷城東, 越江而西, 合圍時錢之面四部落, 焚燒穹廬三百餘所, 斬首幾五百級, 上命遣宣諭官兵曹正郞李大海, 犒勞將士, 命官公之一子, 是役也, 盖公勦胡屢功之最著者, 赫赫若前日事也, 後世, 雲仍之追慕壽傳, 無如繪事之七分典型, 故公之孫水使公, 命工圖寫綃障, 幾本珍奉于宗支諸孫矣, 年久渝泐, 旦經回祿, 餘存者只一本, 恐或仍又泯磨, 先蹟, 無瞻依之地, 迺鳩禊財, 描畵新本三件, 依舊家藏, 以寓紹先紀蹟之萬一云爾, 崇禎紀元後四己酉閨夏, 八世孫在寬謹書。
 

 (번역) 선조 병술년(丙戌年, 1586)에 공(公)이 본도(本道, 함경북도)의 병사로 승진하여 옮기니 인위(仁威)가 널리 퍼져 변방이 편안하고 조용하였다. 이에 군무 29사(事)와 금령 27조(條)를 조목조목 진달(陳達)해서 함께 수록하여 『제승방략(制勝方略)』 1건을 만들어 여러 장수들을 모아 강론하여 전최(殿最)에 반영할 것을 시행하기를 주청(奏請)하니 상께서 특명으로 시행하라 하셨다. 방략(方略)이 상세하게 갖춰지고 반포되어 시행된 것은 공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이보다 앞서 북변(北邊)의 야인들이 변방에 이르러 내부(內附)하니 옷가지와 곡식을 지급하여 육진(六鎭)의 성저(城底, 성벽으로부터 10리 이내)에 머물도록 하였는데, 니탕개(尼湯介)가 변방 너머의 야인들을 몰래 유혹하여 경원(慶源)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고령진(高嶺鎭)을 약탈하였다. 공은 그때에 경원(慶源)·회령(會寧)을 다스렸는데 모두 참획(斬獲)의 공을 세운바 있었다.
 정해년(丁亥年, 1587) 겨울에 공이 본영(本營, 북병영)으로부터 순시하여 경흥(慶興)에 도착하여 하오랑(何吾郞) 등을 몰래 붙잡아 죽였다. 그리고 우후(虞侯) 김우추(金遇秋)에게 명령하여 추도(楸島) 부락을 습격하여 파괴하고 그들의 소혈(巢穴)을 없애버렸다. 이 때에 경흥 지방의 무이(撫夷), 시전(時錢) 등의 부락이 강성하였고, 부여지(夫汝只) 부락이 가장 강성하여 제압하기 어려웠다. 드디어 공이 장차 변방을 도모할 일로써 치계(馳啓)하니 상께서 이로 인하여 토벌하는 것을 허락한다고 회유(回諭)하셨다.
 공이 무자년(戊子年, 1588) 정월에 본도의 병사를 징발(徵發)하고 부방(赴防)하는 수병(戍兵)을 더하여 회령부사 변언수(
邊彦琇)와 온성부사 양대수(楊大樹)로 하여금 좌·우위장(左右衛將)으로 삼고, 고령진첨사 유극량(劉克良)과 조방장 이천(李薦)을 좌·우위의 선봉장으로 삼아 행영(行營)에서 습진(習陣)을 하고, 덕명역(德明驛)에서 아침 일찍 그 자리에서 식사를 마치고[蓐食], 좌군(左軍)은 아오랑(阿吾郞) 땅의 백안연대(白顔烟臺)를 거쳐 산을 돌아 북쪽으로 나아가고, 우군은 무이보(撫夷堡)의 성벽 동쪽으로부터 강을 건너 서쪽으로 나와 합세하여 시전의 네 방면 부락들을 포위하여 궁려(穹廬, 유목민족의 장막으로 된 막사) 3백여 곳을 태워버리고 거의 500급을 참수하였다. 상께서 선유관(宣諭官)으로 병조정랑(兵曹正郞) 이대해(李大海)를 파견하여 장사(將士)들에게 음식을 먹여 수고를 위로하고[犒勞] 공의 아들 한 명에게 관직을 주도록 명하였다.
 이 전투는 대개 공이 오랑캐를 무찔러 쌓은 공훈 중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으로 그 혁혁함이 마치 어제의 일과 같다. 후세에 먼 후손들이 추모하고 영원히 전할 수 있는 것으로 바람직한 것은 그림을 그려놓는 것 만한 것이 없기 때문에 공의 손자인 수사공(水使公, 이견(李汧))이 화공에게 명하여 비단에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써서 몇 건을 종손(宗孫)과 여러 지손(支孫)으로 하여금 보배로 받들게 하였다. 세월이 지날수록 색이 바래지고 갈라졌거나 하루아침에 불타서 없어지기도 하여 남아있는 것이 다만 한 건 뿐이라 혹여 남은 것도 민멸(泯滅)되고 닳아서 선조의 사적(事蹟)을 바라보며 의거할 곳이 없어질까 염려되어 이에 재물을 모아 그림 3건을 새로 그려 예전 집안에 간직하던 법대로 소장하여 선조를 계승하고 자취를 기록하는 일의 만 분의 일이나마 다하고자 할 따름이다. 

 숭정(崇禎) 기원 후 4번째 기유년(己酉年, 1849) 윤달(4월) 여름에 팔세손 재관(在寬)이 삼가 쓴다.

 

시전부락(時錢部落)전투 - 장양공정토시전부호도(壯襄公征討時錢部胡圖)

1. 시전부락(두만강 너머에 있는 마을) 전투

   시기 : 선조 21년(1588) 1월 15일(선조실록, 1월 27일)

   전투도 : ‘장양공정토시전부호도(壯襄公征討時錢部胡圖)’ - 여진족 토벌 전투

   소장 : 육군 박물관

   최고 지휘관 : 함경도 북병사 장양공 이일

   조직 체계

 

                                     대장(이일) - 2700여명(2500여명, 선조실록)

                                         | 

                                         | -- 우후 : 김우추 ; 기병 4백

                                         |

                      --------------------------------

                     |                                              |

           좌위(위장 변언수)                       우위(위장 양대수)

           회령 부사                                   온성부사

                     |                                               |

              장수 22명                                장수 24명

                                                           원균 1계원장(一繼援將)

                                                                  종성도호부사(종성부사·종3품)

                                                            이순신 우화열장(右火烈將)

                                                                      조산 만호(종4품) 1587.9 녹둔도 전투

                                                                       - '백의종군'

                                                                      급제(及第)로 우위, 좌화열장(左火烈將)

 

 

그외 지휘관 : 부령 부사 이지시(李之詩)

그외 장수 : 신각, 원호, 서예원

 

길주진(吉州鎭)~온성진(穩城鎭) : 해당 지방 거주 병사 1등, 2등 거주 병사와 행영(行營)의

                                              군사와 경장사(京壯士), 경흥진의 관할 하에 있는 4보의

                                              군마 등 모두 2,700여 명. 기병 2000여명

참고 자료 : 선조실록 1588/01/27

                제승방략(制勝方略) 무이보(撫夷堡)의 고사(故事)

                선묘보감(宣廟寶鑑) 무자년(1588) 조(條)

               

 

백의종군 - ‘장수가 병졸로 신분이 강등되어 복무하는 치욕적 형벌’

                ‘단순한 보직 해임조치로서 장수의 신분을 유지한 채 복무하는 가벼운 처벌’

                당대의 사료들에 “이순신은 시전부락 전투에서 세운 전공으로 백의종군의 처벌에

                서 풀렸다”고 기록.

 

이순신장군 녹둔도 백의종군 때 장수 신분이었다.


(동아일보 2005.04.17)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발발 4년 전인 선조 21년(1588년) 두만강 북쪽 녹둔도에 침공했던 여진족들을 토벌하기 위한 전투에 백의종군(白衣從軍)으로 참전했다. 이때의 백의종군은 ‘병졸로 강등되어 복무하는 형벌’이었을까, 아니면 ‘단순한 보직해임’이었을까. 당시의 전투를 생생히 그린 그림자료를 발굴한 소설가 송우혜 씨가 이 그림 분석을 통해 백의종군의 의미와 이순신-원균의 관계를 밝히는 글을 보내왔다.》


조선시대 무관에 대한 처벌이었던 ‘백의종군’의 실체는 과연 어떠했던가. 현재 우리 문화계와 학계는 이순신 장군이 두 번 겪었던 백의종군은 ‘장수가 병졸로 신분이 강등되어 복무하는 치욕적 형벌’이라는 다수설과 ‘단순한 보직 해임조치로서 장수의 신분을 유지한 채 복무하는 가벼운 처벌’이라는 소수설로 갈려 있다.


그런데 백의종군의 실체를 극명하게 밝혀주는 전투도가 발굴되었다. 선조 21년(1588년) 1월 함경도 북병사(北兵使·종2품) 이일(李鎰·장양공)이 지휘한 여진족 토벌전이었던 ‘시전부락 전투’ 실황을 그린 ‘장양공정토시전부호도’(壯襄公征討時錢部胡圖·105cm×140cm·육군박물관 소장)라는 제목의 채색화이다.


이 전투도는 외적과의 전투에 참전했던 조선군 장수들 전체의 명단과 직책, 편제를 완벽하게 기록해 놓은 조선 역사상 유일한 사료다. 이순신을 비롯한 50여 명의 참전 장수가 확인되는데, 그들은 4년 뒤 발발한 임진왜란에서도 조선군의 중추가 되었다.


이순신은 함경도 조산 만호(종4품)로 근무하던 선조 20년(1587년) 9월에 겪은 ‘녹둔도 전투’ 때문에 백의종군의 처분을 당했다. 그로부터 4개월 뒤 조정의 명으로 이일이 녹둔도에 침공했던 여진족을 크게 토벌한 것이 ‘시전부락 전투’였다. 당대의 사료들에 “이순신은 시전부락 전투에서 세운 전공으로 백의종군의 처벌에서 풀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전투도는 현재 우리 사회가 범한 역사의 오류들을 명쾌하게 바로잡아준다.


첫째, 이순신은 백의종군할 때 ‘장수’의 신분이었다. 당시 해임되어 현직이 없었던 이순신은 과거에 급제한 사람임을 가리키는 ‘급제(及第)’라는 칭호 아래 ‘우위, 좌화열장(左火烈將)’으로 참전했다.


둘째, 현재 ‘원균 명장론’을 주장하는 이들은 추측에 의해 “육진에서 가장 용맹한 장수였던 원균이 시전부락 전투를 지휘해서 승리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당시 종성도호부사(약칭 종성부사·종3품)였던 원균은 ‘우위, 1계원장(一繼援將)’으로 참전해 백의종군 중이던 이순신과 동급의 장수로 싸웠음이 밝혀졌다.


당시 조선군은 2700여 명의 군사를 세 부대로 나눠서 토벌전을 벌였다. 총지휘자인 대장 이일이 거느린 본대는 지휘부였고, 실제 공격은 좌위(左衛:장수 22명, 위장-회령부사 변언수) 부대와 우위(右衛:장수 24명, 위장-온성부사 양대수) 부대가 맡았다. 이순신과 원균은 이때 우위 부대를 지휘한 위장(衛將)인 온성부사 양대수(楊大樹)의 수하 장수들이었다.


싸우는 전사들의 움직임이 생생한 한 장의 채색 전투도가 400여 년 전 역사의 실체를 선명하게 후세에 전하는 모습은 장렬하기 짝이 없다. (송우혜 소설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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