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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양공 이일(李鎰)장군 연구
장양공(壯襄公) 이일(李鎰, 1538.7.7~1601.1.30)장군은 자는 중경(重卿)이다. 조선 태종대 청백리 이백지의 7세손으로 지금의 용인 처인구 포곡면 신원리에서 태어났다. 타고난 성품이 뛰어나고 어려서부터 힘이 장사였다고 전한다. 공은 조선중기 중종대에서 선조대까지 여진족 정벌과 임진왜란시 충무공 이순신 장군, 충장공 신립장군과 함께 한 시대를 풍미하였던 무장이다.
공의 7대조 청백리공 이백지가 5명의 아들을 두니 수강공(守綱公, 府使) . 수령공(守領公, 主簿) . 수상공(守常公, 判官) . 수례공(守禮公, 縣監) . 수의공(守義公, 司直)으로 그중 이일은 판관공 수상(守常)의 후손이다. 이일의 고조부 회충(會忠)은 관직이 첨사(僉使, 종3품)이며, 증조부 승사랑(承仕郞, 종8품) 승효(承孝)는 형조참의에 증직을 받았고 할아버지 환(環)은 선략장군(종4품) 충무위 부사직(副司直)으로 호조참판에 추증되었다. 그리고 아버지 민덕(敏德)은 무과출신으로 함경북도 병마우후(종3품)로 여러번 증직을 받아서 숭정대부 의정부좌찬겸 판의금부사(종1품)에 이르니 공의 직계 선조들은 문반이 많았던 일반 용인이문 중 무관출신이 의외로 많았던 후손임을 알 수 있다.
장양공 이일장군의 묘(용인시 향토유적 21호)는 장군의 고향 신원리 마을에서 고개 넘어 모현면 매산리 산108-1에 있는데 속칭 상촌마을 고씨능이라 불리 운다. 단분으로 상석과 향로석과 문인석 및 묘표가 있으며 간소하고 소박한 형태로 있다.
묘 바로 아래에는 장군이 생전에 타고 다니던 말의 무덤이 있다.
최근(2008.7.) 용인시 문화과에서 공의 묘소 입구 도로포장 및 진입로 돌계단을 조성하고 도로명도 “이일장군로” 로 명명하였고, 오른쪽에는 최근 용인시향토유적(2009.4. 제63호)으로 지정된 공의 8대조 개성유후(종2품) 이사위(李士渭) 묘가 있으며, 저서로 함경도 여진족 정벌을 대비한 병서고전인 『증보 제승방략』2권과 공의 활동을 후손들이 수집 정리한 『장양공전서』3권 등이 있다.
이처럼 북병사 이일은 1583년(선조16년) 여진족 니탕개의 난의 진압부터 시작하여 1599년(선조32년)에 이르기까지 16년간 오랑캐들이 함경도 지역 및 두만강 지역에서 감히 난리를 일으키지 못한 것은 모두 공의 힘이 컸던 것이다. 그러나 현재는 시전부락을 포함한 간도 땅이 중국 땅으로 편입되는 계기가 된 간도협약(1909)이 올해로 100년을 맞이하였고 당시 조선의 영토로 확보하였던 두만강 하류의 녹둔도 지역은 오늘날 러시아와 국경선 문제로 관심이 되고 있는 현실을 돌아 볼 때 400여 년 전 장양공 이일장군의 활동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고 본다.
하지만 오늘날 장양공 이일에 대한 평가는 임진왜란을 당하여 패주를 일삼은 장면의 TV사극 등으로 일반인들은 그동안 부정적이었다고 본다. 당시 같이 활동하였던 충장공 신립과 충무공 이순신에 비해 그 공적이나 역할면에서 과소평가 내지 폄하되고 있는 현실이라고 본다. 이처럼 장양공 이일장군에 대한 그동안 평가에서 크게 2가지 문제가 걸림돌이 되지 않았나 한다. 그중 하나는 여진족의 녹둔도 침략(1587년)에 대한 책임과 관련한 당시 조산보 만호(종4품)였던 이순신장군의 “백의종군” 처리 문제와 다른 하나는 임진왜란시 초기 충주전투에서 도순변사 신립장군과의 관계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소위 “백의종군” 사건에 대한 사실의 진실이 더 밝혀져야 하겠다. 이와 관련하여 『장양공전서』를 보면,
‘장양공 이일이 이순신의 백의종군을 조정에 건의하여 이른바 충무공을 구한 것이다’ 라든가, ‘충무공 이순신이 조산만호로서 군율을 범하여 죄가 장차 헤아릴 수 없었는데 힘껏 청하여 죄를 용서하게 하고 장차 공을 세워 갚도록 하였는데 마침내는 노량의 승첩이 있게 되었다. 그 감식(鑑識)이 또한 이와 같았으니, 나라 사람들이 공을 중흥(中興)의 양장(良將)이라 함이 까닭이 있는 것이다’
라고 평가받고 있음을 주목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러한 공의 업적과 평가와는 달리 일반 세인들의 공에 대한 평가는 부정적이지만, 상주전투의 실패에 대해서는 ‘조정에서 공을 씀이 빠르지 않음에 말미암은 것이지, 그 지혜와 용기가 모자라서가 아닌 것이다’ 라는 지적이 객관적인 상황이라 하겠다. 그리고 이일장군이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 충장공 신립처럼 순국하지 않고 빠져 나온 행동에 대한 평가가 아닌가 한다.
하지만 탄금대 전투의 전후 과정을 보면, 당시 상주에서 방어 실패 후 몰려오는 왜군을 막는 방안으로 장양공 이일은 천하요새지인 문경 조령에서의 방어전략 제안을 제안하였지만, 이를 무시한 것은 당시 도순변사 신립장군의 작전상 판단의 실패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고 본다. 즉, 당시 공에 대한 평가와 관련하여 150여 년 후 이의현(영의정)이 지은 「신도비명」을 보면,
‘섬 오랑캐가 쳐들어오자 한 번 출전해서는 상주의 궤멸이 있었고 두 번 출동해서는 단월의 패전이 있었다. 이로 인하여 사람들은 공이 용맹은 부족하지 않았으나 혹 책략이 부족하지 않았는가 의심하는데 이는 절대로 그렇지 않다. 용병하는 방법은 첫 번째는 기세요, 두 번째는 지형이니, 이것을 잃으면 반드시 패한다. 공이 출전하여 공을 세우지 못했던 것은 혹은 주장의 실책에 연유하였고 혹은 중과부족의 연유하였으니, 이는 참으로 공의 죄가 아니다.’
라고 하였다. 즉, 상주와 충주에서의 실패는 병졸의 중과부족과 책임 수장의 실책에 있다고 본 것은 제반 당시 군사체계와 무기 등 여건과 천하요새 지역인 새재에서의 전투를 피한 주 장수에 대한 책임이 더 크다고 본 것이다.
특히 충주 전투에서 당시 이일장군이 경상도 순변사로 임명되어 상주에서 왜군과 첫 싸움에서 무기와 군사체계상 그 한계를 경험하였기 때문에, 이일장군을 비롯하여 신립장군의 부장 김여물 및 충주목사 이종장 등이 이르기를 “문경새재의 험한 산세에 의지하여 기슭 양쪽에서 복병을 배치했다가 틈을 보아 일제히 활을 쏘아 물리치는 것이 좋다”고 건의 하였지만 도순변사 신립은 오히려 “적병은 보병이고 우리는 기병이니 들판에서 기마로 짓 밟아버리는 것이 효과적인 전술이요, 또 우리 군사들이 훈련이 안 되었으니 배수의 진을 쳐야한다”고 주장하면서 탄금대 앞 평지에다 배수의 진을 친 전투를 고집하였다.
결과는 “천혜의 요새를 포기한 장군 때문에 졌소.” 라는 지적을 피할 수 없다 하겠다. 물론 당시 아군의 군대가 충청도에 들어와 모은 8천명의 병력이었지만 대개 오합지졸 인지라 배수의 진을 치고 전투에 임했다고 생각되나, 30여리에 걸쳐 평균 4,5백여 미터나 되는 험준한 조령 새재의 지형을 이용하자는 장양공의 전투 제의를 무시한 전투 결정은 일본군의 조총 앞에 맥없이 쓰러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결국 고군분투하던 신립장군은 탄금대의 바위 쪽으로 밀려나 벼랑 끝에서 저항하다가 떨어져 월탄(충주 탄금대 벼랑 아래)에 빠져 죽었다. 이 탄금대 전투는 참패로 끝났을 뿐 아니라 ‘8천 고혼’이 이곳에 잠들게 되었고 일본 적군이 서울까지 무인지경으로 밀고 올라 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신립장군에 대한 평가는 당시 선조대왕의 총애를 받던 후궁 인비김씨 차남이자 선조대왕의 4남인 신성군 후(珝)의 장인인지라 그에 대한 평가는 정치적 위치가 고려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본다. 즉, 장양공 이일장군이 30여리 넘는 천하요새 조령 지형을 이용한 전투 제안을 거부하고 배수의 진을 친 신립장군의 탄금대 전투가 결국 충주 남한강 줄기 탄금대 달천강에서 투신 자결로 막을 내렸지만, 그 후 평가는 ‘장렬한 순국’ 으로 전해지고 있다고 본다.
이번 『장양공전서』국역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다양한 자료 정리와 소개로 장양공 이일장군 평가에 큰 도움이 되리라 보고, 특히, ‘임란 초기의 패퇴의 원인을 이일의 무능에 두지 않고 당시의 방어체제의 비합당성에 두어야 한다‘는 지적과 ’서울에서 온 군관들만이 이일을 둘러싸고 용감하게 항전했다.. 이 패전이 이일에게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다‘는 학계의 연구를 간과해서는 안 되리라고 본다.
따라서 필자는 본서의 출판의 의미는 역사상 한 개인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며, 나아가 임진왜란 전후 조선 중기 국방현실과 관련하여 올바른 역사적 진실을 찾는 노력의 일환이라는 면에서도 의미가 크다고 본다.
(저자 이원명 : 장양공 이일장군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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